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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이란? 간략 정리!

by 향긋한커피 2021.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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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순천 반란사건이라고 불렸습니다. 여수와 순천의 주민들이 반란을 일으킨 것처럼 보여지는데 그런게 아니고 단지 두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군대가 일으킨 사건입니다. 그래서 공식 명칭에서 반란이란 단어가 삭제되었고 다른 명칭은 여순 14연대 반란사건 또는 여순군란이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사건의 배경

사건의 직접적인 발달은 제주4.3사건 일부 진압 임무를 14연대의 좌익 군인들이 "동족상잔"이라며 지휘관을 사살하고 장병들을 선동한 것에서 사작되었지만 공산세력의 침투 및 미군이 그 침투를 통제하지 못한 점 역시 문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을 알고 싶다면 여기를 참고하세요

 

여순사건

1948년 10월 19일 전라남도 여수·순천 지역에서 일어난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의 반란과 여기에 호응한 좌익계열 시민들의 봉기가 유혈 진압된 사건. 1948년 10월

100.daum.net

 

 

 

 

다음은 나무위키에 나온 정부의 반응입니다.

 

이 사건은 이승만 정부 6.25 전쟁 이전부터 치안유지법 국가보안법으로 개정하고 강경한 반공주의 성향의 국가를 구축하는 근거로 사용되었으며, 또한 박정희 정권과 이후 군사정권 기간 내내 철저한 반공주의 국가를 유지하는 근거로 오랜기간동안 사용되었다. 정부 측의 학살이 훨씬 더 많았다는 사실을 역사학계에서 공공연하게 밝히기 시작한 것은 거의 60년이 지난 후였으며, 그 전까지 교과서는 물론 모든 매체에서 일방적으로 반란군의 탓으로 돌려왔다.

이범석은 이게 극우와 극좌의 합작이라고 발표했다.[39] 그래서 당시 국회 속기록에도 나온다. 이걸 가지고 김구가 여순사건에 관련이 있다는 둥 루머가 퍼져나갔다. 김구 암살 관련 미 정보문건을 보면 김구, 염동진은 우익 반대파 장교들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했다고 한다. 역사편찬위에서는 염동진과 몇몇 장교들의 발언 가지고 하는 거라서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했다.[40]

심지어 5.10 제헌국회의원 선거때 이승만에게 대항하여 출마한 최능진 전 미군정청 경무부 수사국장과 백범 김구 선생 계열로 48년 9월 29일 해임된 오동기 전 14연대장(광복군 출신)을 이른바 ‘혁명의용군 사건’으로 조작하여 구속했는데, 이 사건과 뒤섞어서 여순반란 사건의 총책은 최능진과 오동기라는 괴랄한 결론을 내린다. 이에 최능진은 사형, 오동기는 징역 10년을 받았다. 상술했다시피 김지회는 적색장교로 분류되어 연대 작전주임 보좌관이라는 요직에서 대전차포중대장으로 좌천되었는데 이를 지시한 사람이 당시 14연대장 오동기 소령이었다. 오동기 소령은 직접 상경하여 군 고위층에 김지회의 구속 건의까지 하였지만 증거가 없는데 어떻게 장교를 함부로 구속하느냐고 하여 허위로 몰아간 적이 있다. 이런 그에게 반란의 주모자라고 하니 본인은 환장할 노릇.

결국 여순 반란이 북로당+소련의 지시라고도 하고 싶고, 정치적으로 눈에 가시인 김구의 지시라고도 하고 싶으니 결국 이걸 짬뽕하여 극좌와 극우가 함께 머리를 맞대고 일으킨 사건이라는 결론. 이 사건이 북로당+소련의 지시인지, 자신의 세력 약화에 조급해 했던 박헌영이 독단적으로 일으킨 남로당 이현상을 통해 일으킨 사건인지, 친일경찰과의 불화와 제주도로 출동을 거부한 14연대가 우발적으로 일으킨 사건인지[41] 등 이견이 있었다.

다만 확실한 건 김구가 북측과 짜고 일으킨 우익 쿠데타라는 것이나, 북한측에서 주장하듯 박헌영이 미군과 짜고 군내 세포조직을 소멸하기 위해 일으킨 사건이라는 것은 신빙성이 부족하다. 어째 극우든 극좌든 생각하는 것은 비슷한 것 같다. 어떤 사건이 일어나든 실체와 관계 없이 잘되면 내 공로이고 안되면 정적에게 뒤집어 씌우기.

그러나 김구 안티세력에서는 이를 실제 있었던 일이라고 주장하면서 반란에 진압하러 갔다가 반란군이 된 제4연대장의 이름을 최남석이라고 주장하는데 저건 당시 기록이 잘못된 것이다. 여기에 대해 다룬 오마이뉴스도 있다.#

실제로 여순사건이 일어나기 전 오동기 제14연대장에서, 제4연대장이었던 박승훈이 후임 연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 후임 제4연대장은 이정일[42]이다. 훗날 이성가[43] 개명한다. 중국 국민혁명군 장교로 국민당정부의 정보조직인 남의사에서 활동했으며,해방전후에는 한국 광복군 북평 잠편지대 소속이었다.

저 극우 부분은 박정희 시대때 삭제되는데, 박정희에게 있어서도 흑역사였다. 당연히 박정희에 대한 부분도 삭제된다. #,# 박정희 본인이 여순사건으로 발발한 숙군의 대상이었을 뿐더러, 극우=김구를 지칭하는만큼 박정희로서 그냥 놔둘 일은 없었다

 

 

반란군에 대한 평가

여순사건 당시 반란군과 진압군이 저지른 민간인 학살이 존재했다는 점은 합의가 됐지만, 반란군의 반란 동기와 이들에 대한 평가는 여러가지 의견이 혼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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